諸葛武侯戒子書曰, 君子之行, 靜以修身, 儉以養德.
제갈무후계자서왈 군자지행 정이수신 검이양덕
제갈무후가 자식에게 글로서 훈계하기를, 군자가 행실은 안정되게 몸을 수양하고 검소한 생활로 덕을 기르는 것이다.
非澹泊, 無以明志, 非寧靜, 無以致遠.
비담박 무이명지 비영정 무이치원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게 할 수 없으며, 편안하고 안정되지 않으면 원대한 뜻에 이를 수 없다.
夫學須靜也, 才須學也.
부학수정야 재수학야
배움은 모름지기 안정되어야 하며, 재능은 모름지기 배움이 필요하다.
非學, 無以廣才, 非靜, 無以成學.
비학 무이광재 비정 무이성학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넓게 펴지 못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배움을 완성할 수 없다.
慆慢, 則不能硏精. 險躁, 則不能理性.
도만 즉불능연정 험조 즉불능이성
방자하고 오만하면 정밀하게 연구할 수 없으며, 음험하고 조잡하면 이성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年如時馳, 意與歲去, 遂成枯落.
연여시치 의여세거 수성고락
나이는 시간과 함께 속절없이 달려가고, 뜻한 바 의지는 세월과 함께 가버리는 것이니 마침내 시들어 낙엽이 되어 떨어지게 된다.
悲歎窮廬, 將復何及也.
비탄궁려 장복하급야
곤궁한 오두막집에서 탄식한들 장차 다시 어쩔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註1) 葛(칡 갈), 戒(경계할 계), 澹(담박할 담,맑을 담), 泊(배댈 박), 須(모름지기 수), 慆(기뻐할 도), 慢(게으를 만), 險(험할 험), 躁(성급할 조), 馳(달릴 치), 遂(드디어 수), 枯(마를 고), 歎(탄식할 탄), 廬(농막집 려)
(註2) 무후전서(武侯全書)에 나온다. 제갈무후는 제갈량(諸葛亮)을 말하며,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이다. 지금의 호북성인 형주에서 칩거하던 중 조조에게 밀려 형주로 온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고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설파하였다. 오나라와 연합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을 대파하고 형주에 유비의 터전을 마련하여 삼분지계를 성공시켰다. 와룡선생이라고 불렸으며, 실제 소설 삼국지 연의에서 나오는 것처럼 촉한의 유비를 도왔고, 후일 유비가 죽으면서 아들 유선이 무능하면 대신 황제위에 오르라고 유명을 받았으나 끝까지 유비의 아들인 후주 유선을 보필하다가 죽었다. 소설에서와 달리 정사 삼국지에서는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의 역할이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그가 조비의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후주에게 올린 전,후출사표는 읽는 사람이 비창하게 할 정도로 충의가 드러나 있다. 소설 삼국지를 읽어 본 사람은 제갈량의 지략과 외교술 그리고 충의정신에 감동을 받는다. 꾀는 조조, 지략은 제갈공명이라는 얘기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후한 말 이후 위,촉,오 삼국이 겨뤘던 삼국시대에 역사적 정통성은 조조의 위나라가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제갈량이 성공한 남만정벌에서 칠종칠금의 고사를 남겨놓은 맹획과의 전투는 사실상 이민족에 대한 침략행위였다. 촉한이 가진 열세의 국력과 군사력은 제갈량의 지모로 어느 정도 보완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위나라에 비하면 힘이 기우는 열세에 처해 있던 지방정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갈량은 위나라 사마의와 대결 하던 중 오장원에서 병사하였으며 중국인들은 그의 충절을 기려 무후사(武侯祠)라는 사당을 지어 지금도 향을 올리고 있다. 제갈량 사후 그의 아들 제갈첨 역시 후주를 섬겼으나 위나라에 의해 촉한이 패망하면서 전사하여 충절을 빛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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