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논어 (論語) - 제12편 안연 (顔淵): 군군 신신 부부 자자 #7

몽그림 2022. 10. 17. 03:07

齊景公問政於孔子

제경공문정어공자

제경공이 정치에 대해 공자께 묻자,

 

孔子對曰君君  臣臣  父父  子子

공자대왈    군군   신신  부부  자자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 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입니.’라고 하셨다.

 

公曰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공왈   선재   신여군불군   신불신   부불부   자불자

경공이 듣고서 ‘좋은 말씀이로다. 만약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고 아버지가 아버지 답지 않고 자식이 자식답지 않으면

 

雖有粟  吾得而食諸

수유속   오득이식제

비록 곡식이 있다고 한들 내 어이 먹을 것인’라고 하였.

 

(1) (조 속), 雖有粟(비록 곡식이 있어도)

 

(2) 당시 제나라는 진환이 장악하여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신하가 신하답지 않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고 아들이 아들답지 않아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차지시, 진환제제, 군불군, 신불신, 부불부, 자불자, 고이대 此之, 桓製, , , , , 以對). 장차 위기가 있을 것이고 진씨가 결과적으로 제나라를 위협하리라 한 것이다 (언장위야, 진씨과멸제 將危也, 氏果滅齊). 제경공은 이름이 저구이고 노소공 말년에 공자는 제나라로 갔다 (제경공, 명저구, 노소공말년, 공자적제 景公, 名杵臼. 魯昭公末年, 孔子適齊)이는 인간의 도리가 큰 길이며 정사의 근본임을 말한다 (차인도지대경, 정사지근보야 人道之大經, 政事之根本也). 제경공은 실정하고 대부 진씨는 나라에 후한 정책을 폈다 (시시경공실정, 이대부진씨후시어국 是時景公失政, 而大夫陳氏厚施於國). 경공은 후궁이 많고 태자도 세우지 않았으므로 군신과 부자간에 모두 그 도를 잃은지라 공자가 이렇게 고한 것이다 (경공우다내폐, 이불립태자, 기군신부자지간, 개실기도, 고부자고지이차 景公又多內嬖, 而不立太子, 其君臣父子之間, 皆失其道故夫子告之以此). 경공은 공자의 말을 좋다고 하였으나 등용할 수 없었고 후일 후사를 정하지 못하여 진씨가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하는 화를 불렀다 (경공선공자지언이불능용, 기후과이계사부정, 계진씨시군찬국지화 景公善孔子之言而不能用, 其後果以繼嗣不定, 啓陳氏弑君簒國之禍).

 

(3) 제경공(齊景公)은 아주 복잡한 혼란의 와중에 제나라 군주로 등극하였다. 공자는 노소공이 노나라의 삼환의 권력싸움에 밀려 제나라로 망명한 후제나라로 와서 제나라 대부인 고소자의 가신이 되었다노소공이 망명할 당시 공자는 노나라에서 삼십대 초반의 연부력강한 재야학자로 있었다. 당시 노나라에서 삼환씨 가문은 노소공의 신하임에도 군주의 권위를 넘어서는 전횡을 일삼고 있었다. 이런 삼환의 가문을 제거하고자 시도하던 노소공은 오히려 삼환씨 가문의 반격으로 제나라로 도망친 것이다노소공의 제나라 망명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일찍이 노나라 환공은 제나라의 공주인 문강과 결혼하였다가 제환공의 아버지인 제양공에 의해 살해되었다제양공은 자신의 여동생인 문강과 부적절한 관계였고 이를 노환공이 알게되자 술을 먹여 팽생이라는 심복장수를 시켜 노환공을 죽여버렸다. 이후 노나라와 제나라는 서로 구원을 가진 관계였지만 힘이 약한 노나라는 제나라에 대해 대개의 경우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가진다노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자 공자도 노나라 삼환의 횡포를 비켜나 제나라로 왔던 것이다제경공과 공자는 아들뻘 이상의 나이차가 있었고 공자는 당시 제나라의 실세인 재상 안영과 접할 수 없게 되자 대부인 고소자에게 가신으로 의탁하여 제경공에게 접근하였다제나라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여 나라를 세우고 각지의 제후를 봉후할 때 이른바 강태공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태공망을 제후로 봉한 나라였다. 제후국 중 가장 좋은 환경이었던 만큼 국력도 다른 제후국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였다당시 노나라와 제나라는 현재의 한일관계와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제나라는 실리적 외교술과 전투 군사력을 강화하는 패권추구의 노선을 추구하였고 노나라는 인의예지를 숭상하고 정신적 도덕성과 정통성의 우월감을 내세우고 있었다제나라는 제환공 시절 관중과 포숙을 등용하여 춘추시대의 최초의 패권국이 되었으나 점차 군주의 도덕적 타락과 집권층의 부패, 그리고 왕위승계 과정에서의 잦은 변란으로 점차 국력이 쇠퇴해지고 있었다. 제양공이 병이 들자 태자인 광(光)을 내쫒고 후첩인 양희의 아들인 아(牙)를 태자로 세웠지만 권신인 최저는 제양공이 죽자 아를 죽이고 폐태자 광을 왕위에 올리니 이 사람이 제장공이다제장공은 자신을 옹립한 권신 최저의 후처 당강과 정분을 통하다가 분노한 최저에 의해 시해되었고 그의 이복동생이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제경공이다이 때 재상 안영이 실정과 패악을 일삼고 있던 경공을 보좌하여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다후일 재상 안영이 죽고 나자 대부 진환이 군주인 제경공을 능가하는 권신으로 등장하고 진읍(陳邑)을 중심으로 인심을 얻은 진환의 아들 진걸에 의해 제간공이 시해되므로서 강씨의 제나라는 멸망하였다이후 태공망의 강씨 왕족은 진나라로 망명하고 진걸은 전씨(田氏)로 성을 고쳤으므로 이 때부터 전제(田齊)라고 하여 강제(姜齊)와 구별한다제경공의 군주로서의 실정이 제나라 멸망의 단초가 된 셈이다제경공의 공자 등용은 제후국간의 실리적 외교로 국익을 다지던 재상 안영에 의해 저지된다첨예한 무력충돌과 패권경쟁을 하던 당시의 제후국간의 대결구도에서 안영은 공자를 구상유취한 도덕선생으로 생각하였다지금 우리나라의 도덕군자가 일본정계에서 등용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교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무력증강과 외교적 밀약을 추구하는 일본에서 인의정치가 먹혀들 리가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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