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논어 (論語) - 제6편 옹야(雍也): 비감후야 마불진야 #8

몽그림 2022. 7. 22. 08:23

孟之反不伐奔而殿將入門策其馬曰,

자왈    맹지반불벌    분이전    장입문   책기마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맹지반은 자랑을 하지 않았다전쟁에 패하여 후방을 지키고 성문에 들어서자 말을 채찍질하면서 말하기를,

 

非敢後也馬不進也.

후야    마불진야

감히 뒤처지려 함이 아니라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1) (칠 벌), (달릴 분), 殿(대궐 전) ,(채찍 책)

 

(2) 전(殿)은 군대의 후방을 말한다. 전방은 계()라고 한다. 맹지반은 어질고 용맹이 있었다. 군이 대패하자 홀로 후방에서 싸운 후 성에 들어와 환영을 받고 그 공을 인정받았다 (맹지반현이유용, 군대분, 독재후위전, 인도, 공지 之反賢而有勇, 軍大奔, 獨在後為殿. 人迎, 功之). 맹지반은 노나라 대부로 이름은 측(側), 지반(之反)은 자이다.

 

(3) 맹지반은 제나라 군대가 침략하자 성밖으로 나가 싸웠으나 대패하였다.  그러자 도망가는 노나라 군의 뒤에서 제나라군과 독전하면서 노나라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간 뒤 맨 후미에서 성안으로 들어 갔다공자는 이를 자기 희생의 인(仁)으로 본 것이다. 또한 자신의 공을 내세우기보다는 다만 말이 잘 달리지를 못하여 후미에 처진 것이라고 한 것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칭찬한 것이다패군지장이 크게 군공을 내세울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공자는 맹지반의 겸손함과 자기희생의 인을 실처한 예로 든 것이다공자는 공을 내세워 자랑하지 않고 자기희생을 인(仁)이라고 보는 것이다.

 

 

子曰不有祝鮀之佞而有宋朝之美乎免於今之

자왈   불유축타지녕   이유송조지미   난호면어금지세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관 타처럼 뛰어난 언변이 없으면서 송조처럼 아름다운 외모만 있다면 지금의 난세에 화를 면하기 어렵다.’라고 하셨다.

 

(1) (질 축), (문절망둑), (아첨할 녕)

 

(2) 영/녕(佞)은 말재주가 뛰안 것이고 (구재야 ), 축타는 위대부 자어이며 (축타, 위대부자어야, 시세귀지 鮀, 衛大夫子魚也,時世貴). 송조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음란하였다 (송조, 송지미인이선음  朝, 宋之美人而善淫)

 

(3) 위대부 타는 사어(史魚)를 말한다.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축문을 읽어서 축타라고 하였다. 언변이 뛰어나 위영공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나 여러 차례 간하고 능숙히 그를 보좌하였다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화살처럼 곧고 도가 없어도 화살처럼 곧으니 군자라고 평가 하였다송조(宋朝) 송나라 공자로 조(朝)이름이고 위나라 대부로 있었다위나라에 있을 때 양공(襄公) 부인 선강(宣姜) 영공(靈公) 부인 남자(南子)와도 사통하였다. 이 얘기는 정설과 흥미가 섞여 있기도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보는 사람에 따라 관점이 바뀐다먼저 선강의 경우는 희대의 요녀로 알려져 있으며 위나라의 정치를 혼란으로 몰고 간 악녀로 알려져 있다선강은 제희공의 딸로(혹은 궁녀) 제나라의 패권전략에 따라 위나라를 제나라의 세력권으로 두기 위해 선공의 아들인 세자에게 시집갔다그러나 선강을 보고 반해버린 위선공은 자신의 애첩을 삼았고 선강은 아들을 낳았다왕비가 되지 못하고 시아버지인 위선공의 애첩이 된 선강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책략을 썼고 그 결과 위선공의 세자인 급자와 자신의 아들마져 죽게 된다충격을 받은 위선공이 죽자 별궁으로 물러앉아 있던 선강은 미모와 제환공의 누나라는 힘을 이용하여 소백(죽은 세자 급자의 동생)과 강제로 동침하여 결혼하였다처음 세자인 급자에게 시집와서 시아버지의 애첩이 되어 아들을 낳고 세자를 죽였으며 다시 세자의 동생인 소백과 결혼하였으니 위왕실의 촌수가 이상하게 되었다소백이 위양공으로 즉위하자 선강은 위나라의 왕비가 된다. 선강은 대공과 문공을 비롯한 오 남매를 낳았으나 당시 위나라의 대부로 있던 송조가 인물이 뛰어난 것을 보고 그와도 사통하였다선강으로 말미암아 위나라 왕실은 친족관계가 이상하게 엉키고 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선강은 중국 역사상 요부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또한 남자(南子)그 후 위영공의 왕비였는데, 매우 행실이 음란한 여자로 알려져 있다. 남자와 공자에 대한 얘기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대단한 흥미거리가 되고 있다. 송조는 남자와 이복남매간임에도 사통을 하였고 이미 행실이 좋지 못한 소문을 알고서도 공자가 남자를 만난 기록이 논어에 나오는데 사람들은  공자의 여색 스캔들로 얘기를 많이 만들었다당시 위나라는 공자의 주유열국에서 거점이 되었고 공자의 제자 자공, 자로가 벼슬을 한 것도 공자와 남자의 관계를 다시 보게 하는 일이다여러가지 얘기 중에서 하나는 왕비인 남자가 공자를 사모하여 권력과 재력을 후원하였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공자와 남자가 이성으로 좋아했다는 얘기가 그것이다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와 남자와의 만남을 비판한 것으로 보아 공자 역시 미모의 왕비와 썸타는 관계였는지 모를 일이다아이러니니하게도 남자(南子)인해 여자(女子)라는 보통명사가 생겨났다여자는 여인네를 높여 부르는 공자, 맹자와 같은 높임말이다. 공자가 사랑했는지도 모르는 한 왕비를 위해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은 공자와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위왕실은 그 이후에도 남자를 죽이고 세자가 국외로 망명하는 등 왕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나라였다춘추시대의 제후국 중에서 노나라와 같이 약소국이면서 국가 경영자의 도덕적 타락으로 위나라는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점차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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