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논어 (論語) - 태사공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 #1

몽그림 2022. 4. 12. 00:49

태사공 사마천의 사기

태사공 사마천은 한무제 때의 인물이다. 궁형을 당해 불우한 삶을 살면서 시대의 역사서인 태사공서(太史公書) 완성하였다후에 그의 저술은 사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고, 동양 고대의 역사는 거의 그가 쓴 역사의 기록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태사공 자서(自書) 사마천 자신에 관한 내용을 쓴 것으로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여기에 보면 사마천의 선계는 주왕실의 사관으로서 복무하였고, 초한 쟁패시에 활약한 은왕 사마앙이 또한 방계의 혈족이라고 밝히고 있다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사관의 맹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던 사마천의 선대는 아버지인 사마담이 한나라의 태사령(太史令) 되면서 역사의 기록을 다시 담당하게 되었다열 살이 되었을 때부터 사마천은 많은 역사의 기록물을 읽었으며, 스무 살이 되자 중국의 역사적 현장을 두루 다니며 역사에 대한 실증적 지식을 쌓기에 이른다. 그리고 사마천이 남만정벌에 나갔을 때 그의 아버지 사마담은 사관으로서 황제의 봉선의식에 따라가지 못한 것을 한하여 병을 얻었다사마담은 죽으면서 아들 사마천에게  주왕실에서 자신의 선계가 사관으로 썼던 기록이 있었으며, 오백 년 후 공자가 나타나 춘추를 저술하여 역사를 기술하였고, 다시 그 뒤 오백 년 동안 끊어진 역사의 기록을 다시 정리하려 하였으나 지금 죽게 되니 이 유업을 계승하라고 말하였다이를 약속한 사마천은 한무제에 의해 인간으로서 가장 치욕적인 궁형을 받고 죽음의 갈등과 번민을 하게 된다. 흉노를 정벌하던 장군 이릉이 포로가 된 것을 옹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고 사형선고를 받았다사형선고를 받고 이를 면하기 위해서 오십만 냥의 속죄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아야 하는데 가난했던 사마천은 비인간적인 궁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이후 기원전 98년 궁형을 받았던 사마천은 그 후 대사령을 받고 궁중에서 재상급인 중서령에 올랐는데 이는 내시의 우두머리로 왕명출납을 담당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자신의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아버지의 유훈을 명심하고 불후의 역사서를 집필하는데 몰두하였다. 마침내 기원전 91년 역대 왕실의 본기(本紀) 12, 예(禮) 악(樂) 등에 관한 문화사인 서(書) 8,제왕(帝王)년표(年表) 표(表) 10권과 제후들의 인물기록인 세가(世家) 30, 한신, 장량 등 뛰어난 인물들에 관한 열전(列傳) 70권을 포함한 총 13052만 자(字)태사공서(太史公書) 완성하였다. 기원전 110 사마천이 사관인 태사령이 되면서 시작한 태사공서의 저술은 궁형을 받고 2년 간의 감옥생활을 한 뒤에 환관인 중서령으로 있으면서 완성하기 까지 무려 이십 년이 걸려 완성한 것이다. 아버지인 사마담이 남긴 역사 자료 기록과 자신이 조사하고 검증한 자료를 토대로 저술한 방대한 역사서가 후대에 사기(史記)로 불리어 진다.

 

사마천은 한무제 때의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에게 사사하였는데 이 때 유가(儒家)와 공자의 이론에 대한 시각을 얻었을 것이다사마천은 자서에서 하(夏), 은(殷), 주(周) 삼대의 역사는 미루어 추정하였고 그 후의 기록은 수집한 자료와 역사서를 바탕으로 썼다고 하였다자신이 밝힌 대로 주왕실의 예악이 무너지고 역사의 기록이 훼손될 즈음 공자가 나타나 예악을 밝히고 춘추를 기록하여 역사 기록의 맥을 잇, 오백 년 후 자신이 예악을 밝히고 진정한 역사의 기록을 이어나간사마천의 기록 대로라면 그 자신은 공자를 잇는 역사가인 것이다이러한 이유도 작용하여 사마천은 제후가 아닌 공자를 세가(世家) 포함시켰고, 공자의 제자들을 중니제자열전으로 정리하여 열전(列傳)에 썼다자신에 관한 기록 또한 열전의 마지막으로 70권에 썼다사마천 자신은 공자의 묘당을 방문하여 공자의 행적을 직접보고 배우기도 하였으며 공자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기하고 있다

 

사마천의 태사공서의 위대함은 방대한 기록 뿐 아니라  역사의 기록에 대한 객관적 시각과 실증적 사고에 의한 기록물이라는 점이다공자세가의 기록은 인간 공자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공자의 유학은 사마천이 태사령으로  일하던 한왕조에서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이 물론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 사마천은 공자를 세가(世家)로 분류하여 썼을 것이다자신이 배웠던 동중서(董仲舒) 영향과 역사서 춘추를 쓴 공자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 공자에 대한 사마천 자신의 경외심이 작용하였던 것은 그 자신이 쓴 열전의 사마천 자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마천이 태사공서(太史公書) 쓸 무렵의 황제인 한무제(漢武帝)는 유학을 장려하고 유학을 공부한 많은 사람을 중용(重用)하였다.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의 팩트에 대해서 지금 우리가 검증할 방법은 당연히 한계를 띌 수 밖에 없다그러나 대부분의 기록이 공자가어(孔子家語) 등 다른 기록과 일치하고 있는 것은 신뢰성을 높여주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또 공자세가의 기록은 논어와 공자의 사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공자가 말한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당시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시대 상황과 입장을 알지 못하면 공자가 한 말은 그냥 의미있고 교훈적인 문장으로 읽혀지고 만다그것에 대한 의미도 분명 있지만 기왕 논어를 읽을 바에야 공자가 말하고 구현하고자 했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사마천의 공자세가는 그 자체가 성인의 일생이고, 성인 공자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그리고 공자를 가장 잘 대변한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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