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논어 (論語) - 태사공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 #2

몽그림 2022. 4. 13. 01:29

索隱孔子非有諸侯之位, 而亦稱系家者以是聖人為教化之主又代有賢哲故稱系家焉.

색은공자비유제후지위    이역칭계가자     이시성인위교화지주     우대유현철    고칭계가언

색은에 따르면 공자는 제후의 지위가 아니었다. 세가로 부르는 것은 공자가 성인으로서 교화를 한 종주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진 철리가 대대로 이어지니 세가라고 이르는 것이다.

 

正義孔子無侯伯之位而稱世家者太史公以孔子布衣傳十餘世學者宗之.

정의공자무후백지위     이칭세가자     태사공이공자포의전십여세     학자종지

정의에서는 공자가 후백의 지위는 아니지만, 세가로 칭하는 것은, 공자는 포의였으나 태사공까지 십여 세를 학자들의 종사로 전해왔고,

 

自天子王侯. 中國言六藝者宗於夫子. 可謂至聖故為世家.

자천자왕후    중국언육예자종어부자    가위지성    고위세가

천자 왕후에서 부터 중국 육예를 말하는 사람들의 종사였기 때문이다. 가히 지극한 성인이라 이를 수 있으니 세가로 쓴다.

 

孔子生魯昌平鄉陬邑其先宋人也曰孔防叔防叔生伯夏伯夏生叔梁紇.

공자생노창평향추읍     기선송인야     왈공방숙   방숙생백하     백하생숙량흘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이다. 공방숙이 백하를 낳고,백하는 숙량흘을 낳았다.

 

紇與顏氏女野合而生孔子禱於尼丘得孔子魯襄公二十二年而孔子生.

흘여안씨녀야합이생공자      도어니구득공자    노양공이십이년니공자생 

흘이 안씨녀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니구산에서 기도하여 공자를 낳았으니 노양공 이십이년의 일이다.

 

生而首上圩頂故因名曰丘云字仲尼姓孔氏.

생이수상우정    고인명왈구운     자중니    성공씨

태어나자 머리 정수리에 옥정처럼 패였으므로 이런 이유로 이름을 구라고 불렀다. 자는 중니,성은 공씨다.

 

() ① 창평향 추읍은 사수 남쪽 오십리에 있었으며 지금의 곡부이다

 공자는 송미자의 후예이다송양공이 불부하를 낳았다송양공은 동생 여공에게 제후위를 물려주었다. 불부하는 송부주를,송부주는 세자승을, 승은 정고부를 고부는 공부가를 낳았으니 공부가는 공자의 오대조이다. 공부가는 대부였으나 화독이 송상공과 함께 살해하였다공부가는 자목금부를, 금부는 필이를, 필이는 방숙을 낳았는데 화씨의 핍박을 피해 노나라로 옮겨왔다. 

숙량흘이 노나라 여자인 시씨와 혼인하여 아홉 명의 딸을 얻고 ,다시 첩을 얻어 아들 맹피를 낳았지만 발에 병이 있었다. 이에 숙량흘은 안씨 가문의 셋째딸 징재와 혼인하였는데 64세가 지난 후였다. 

 

 

生而叔梁紇於防山在魯是孔子疑其父墓諱之.

구생이숙량흘사    장어방산    방산재노동     유시공자의기부묘처     모휘지야

공자가 태어나고 숙량흘이 죽어 방산에 장사지냈다. 방산은 노나라 동쪽에 있는데 공자의 어머니가 일러주지 않았기에 공자는 부친의 묘가 있는 곳을 궁금해 하였다.

 

子為兒嬉陳俎.

공자위아희희    상진조두    설례용

공자는 어릴 적에 제기를 늘어놓고 예를 치르는 모습을 하며 놀기를 좋아하였다.

 

子母殯五父之,   其慎.

공자모사    내빈오부지구     개기신야

공자는 어머니가 죽자 빈소를 오부지구에 차리고 삼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郰人輓父之母誨孔子父後往合葬於防.

추인만부지모회공자부묘     연휴왕합장어방언 

추읍 사람인 만부의 어머니가 공자 아버지의 묘처를 알려주자 어머니를 방산에 아버지와 합장하였다.

 

孔子要氏饗子與.  虎絀氏饗敢饗子子由是退.

공자요질    계씨향사    공자여왕    양호출왕    계씨향사    비감향자야    공자유시퇴

어머니 상중일 때 계씨가 선비를 위해 연회를 열자 공자가 참석하려고 갔다. 양호가 계씨의 향연은 선비를 대접하고자 함이니 감히 참석할 수 없다하여 공자가 물러나왔다.

 

() 공자가 어리다고 하여 계씨의 가신인 양호가 공자를 내쫒은 것이다. (季氏為饌飲魯文學之,子與迎而,虎以孔子,折之也)

세가에 쓰여진 이 글로 인해 공자가 아버지의 집에서 자식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다. 어머니인 안씨 징재가 아버지의 묘소를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안씨녀가 니구산에 정성을 들이는 무녀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고대 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제사장의 후예로 해석하기도 하고, 공자를 무계(巫係)로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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