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는 공자의 언행과 사상을 중심으로 공자와 제자 및 여러 인사들과의 문답과 제자들간의 대화를 공자 사후(死後)에 기록한 책이다. 항우와 중국 대륙의 패권싸움에서 승리하여 한나라 왕조를 열었던 한고조(漢高祖) 유방은 천하를 얻은 후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고 제사를 지냈다.그리고 주(洲), 현(縣)의 관리들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전에 공자에게 먼저 참배하도록 칙령을 내려 사실상 공자의 유학(儒學)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한왕조(漢王朝) 초기에 한고조는 개국공신인 육가, 숙손통 등의 유학자들이 건의한 창업왕조의 안정화와 효율적인 치국을 위해 유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공자학을 중심으로 유가의 학문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한무제(漢武帝)와 동중서(董仲舒)에 의한 것이다. 한무제는 동중서의 현량대책(賢良對策)을 받아들이고 유학을 장려하였다. 정작 동중서는 말년에 불운한 관운으로 칩거하였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나 유학은 한왕조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무제 이후로도 공자의 유학은 역대 중국왕조에서 제왕가(帝王家)의 통치이념으로 이어지게 되고 동양의 사상의 중심에 서게 된다.
공자 사상의 원전(原典)인 논어
공자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은 무력경쟁에 의한 패권경쟁이나 분열된 나라의 통일을 위한 군사력이 앞서는 시대에서는 접목이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나라가 체제를 갖추고 정치행위가 행해지는 시대에는 이보다 매력적이고 합리적인 이론과 사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위 말 위에서 나라와 패권을 쟁취할 수는 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유방의 참모들의 얘기는 통치자들의 솔직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공자 사상의 원전(原典)이라 할 수 있는 논어의 힘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논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비롯한 많은 핍박과 폄훼 속에서도 이천오백 년의 시간 동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 숨쉬며 향기를 내뿜는다. 수천 년 동안 동양에서 이 책만큼 읽혀지고 논란의 대상이 된 책도 없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을 받았던 스테디 셀러이기도 하다. 공자의 사상을 재조명하거나 논어 원문과 그 주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물론 학자들의 몫이다. 공자의 사상은 일상생활에서도 가장 많이 느껴볼 수 있으면서 때로는 지루하고 이해하기 싫어지기도 한다. 고루해 보이고 때로는 지금 삶에서 거추장스런 잔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공자의 사상은 이천 년이 넘게 우리 역사의 사고의 틀을 지배해 왔다는 것과 이미 혈관 속에 녹아 있는 것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행동 규범의 보이지 않는 제약을 주고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하기 힘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의 사상을 분석하고 재조명하고 자구의 해석을 재해석해 보는 것은 전문적인 사상가와 학자들이 할 일이다.
공자는 기원전 6세기에 중국 대륙이 황하 이남의 국지적인 지역에서 치열한 패권경쟁을 하던 수많은 제후국이 명멸하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이 당시의 사회 환경은 막 철기가 보급되고 주나라의 봉건적 지배체제가 균열되면서 분봉된 제후국간의 패권경쟁이 치열하던 시대였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급변하는 세계 국가들간의 경제와 군사 경쟁만큼이나 당시의 입장은 각 제후국의 안보와 힘이 우선하던 시대였던 만큼 하부 백성들의 삶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피폐해진 소(小) 제후국(諸侯國)인 노나라 출신의 공자는 인의(仁義)와 위정(爲政)의 덕목을 주장하였다. 삼 년이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노나라에서의 공자의 정치실험은 미완으로 끝났다. 그의 이상적 정치사상의 주장은 당시에도 접여를 비롯한 은자들에게 비현실적으로 조소를 당하고, 제나라의 안영이나 초나라의 자서등 현실정치가들에게 배척 당하였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를 보좌하던 이사와 같은 법가적 신료들에게 분서갱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사상이 살아남아 생명력을 유지한 것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과 윤리적인 질서에 대한 기본적인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논어의 역사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화두로 붙잡은 것은 인(仁)이다. 군자의 몸가짐이나 의(義)와 예(禮), 신(信)을 비롯한 그의 메시지는 인간의 도(道)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것을 강조한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강열하고 이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 옆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공자는 출신 가문이 미천하였고, 아버지의 묘소를 어머니가 가르쳐 주지 못할 정도로 그의 출생은 정상적이지 못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고 자신을 수양하며 제자를 교육하고 정치를 할 기회를 기다리던 공자는 자신이 살던 노나라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였을 것이다. 노정공에 의해 대사구(大司寇) 행섭상사(行攝相事)로 발탁되어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삼환가의 견제와 주변국의 견제로 공자의 정치실험은 짧게 끝났다. 이후 자신의 주견인 인(仁)을 최고의 이념으로 주창하며 많은 제후국을 주유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양금택목(良禽擇木)에 실패한 공자가 오랜 주유생활을 마감하고 노(魯)나라로 되돌아온 것은 제자인 염유(冉有)가 계강자(季康子)에 의해 가재(家宰)로 발탁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끝내 공자 자신은 스스로 현실정치에 몸담을 수 없었다. 이후 노년의 공자는 죽을 때까지 5년 동안 춘추를 집필하고, 시경을 편찬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들 제자들에 의해 공자의 어록은 논어로 남겨지고 후대에 동양 유가사상의 최고의 원전(原典)이 되기에 이르게 된다. 당시의 죽간(竹簡)등에 기록된 춘추와 공자의 논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맞아 분서로 인해 멸실 될 위기에 처했다. 유학자들의 집과 제자와 후손들이 공묘의 공벽(孔壁)에 숨겨놓은 덕택에살아남은 논어는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 후 고본으로 전해진 노논어(魯論語), 제논어(齊論語), 고논어(古論語)의 세 종류의 논어를 노논어를 중심으로 한왕조 시대에 정리하여 논어의 원본(原本)이 만들어졌다. 그 후 송나라 주희가 새로운 해석을 하고 논어집주(論語集註)로 정리함으로서 후세의 사람들은 논어를 더욱 가까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사서집주로 논어(論語), 대학(大學), 중용(中庸), 맹자(孟子)를 재정리하고, 유가의 사상을 재해석한 주희는 정주학으로 유가를 재단장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정주학이 유가의 중심으로 조선시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주희는 대학을 읽고 난 후 논어를 읽으라 하였고, 율곡은 소학을 먼저 읽고 논어를 읽으라고 하였다. 대학 역시 공자의 말을 증자와 그의 문도들이 정리한 것이고, 소학 역시 유가의 사상을 수록한 것이다. 주희와 율곡은 유가의 기본 사상을 터득한 후에 논어에 함축된 의미를 이해하며 읽어야 제대로 논어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논어의 영향
논어를 읽어보면 쉬운 듯 하지만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한참을 음미하고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숨겨진 뜻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의 각 편에 주해를 달고 나름대로의 학문과 경륜으로 해석을 하였으며 현재도 이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학자가 아니라도 논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번역하고 해석한 것이 일반인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라면 논어에 나오는 한 두 귀절은 외우고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정치인이나 공직자, 학자들은 심오한 의미로 해석하고 이 성구(成句)를 인용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정확하고 사실적일 때 이런 메시지는 강열하게 전달된다. 이런 것을 보면 공자사상 만큼이나 우리생활에 영향을 준 사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불교와 근세의 기독교 문화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종교적인 성향이 강하다. 사고와 생활규범에서 미치는 영향은 공자사상이 오히려 강력해 보인다. 과거 우리가 접했던 공자사상은 거의 이천 년이 넘는다. 이러한 연륜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혈관에 침투되어 그대로 전승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성덕왕 때인 713년 김수충이 당에서 공자와 공문십철(孔門十哲)과 칠십이현(七十二賢) 제자의 화상을 가져와 국학에 모시면서 공자의 문묘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려 선종 때 유학자인 김양감(金良鑑)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정자문(程子門)에서 배우고 태학과 태묘의 도본을 들여오고 공자의 사당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성균관에 문묘를 설치하고 공자와 사성(四聖), 십철(十哲), 칠십이현(七十二賢)을 배향하면서 우리나라의 설총, 안향, 정몽주와 조선의 유학자 열다섯 명을 함께 배향하여 제사를 지냈다. 공자로부터 발원한 유학(儒學)은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위세를 떨쳤고 국가의 통치이념이며 기반이 되었다. 또한 공자의 문묘에서는 우리 조선 왕조에서 제후의 육일무(六佾舞)를 제례에서 사용한 반면 팔일무(八佾舞)를 거행한다. 이는 당나라 현종의 문선왕(文宣王)을 비롯하여 중국의 역대 왕조의 황제들이 공자를 소왕(素王)에서부터 시작하여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만세사표(萬世師表)로 추증하기까지 공자를 황제의 반열로 추증하였기 때문이다.
논어의 이해
말년에 정치를 단념한 공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를 양성하면서 시, 서, 예, 악, 역, 춘추(詩,書,禮,樂,易,春秋)등 육경(六經)을 정리하고 저작하였다. 공자의 사상은 인(仁)이 근본이며 애(愛)와 서(恕), 충(忠)이 인(仁)을 구성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애(愛)는 사랑이며 자신의 자존과 다른 사람의 자존을 포함하는 광의(廣意)의 의미이며 서(恕)는 용서하는 관용이고 충(忠)은 자기 자신을 선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주희(朱熹)는 해석하였다. 덧붙여 오상(五常)을 생각해보면 예, 의, 지, 신(禮, 義, 智, 信)은 인(仁)을 구현하기 위한 하위의 종속개념이자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정치(政治)란 덕(德)으로 바르게 다스리는 정치(正治)라고 한 것도 인(仁)을 실천하면 자연히 이루어지는 일이다. 인은 사람과 하늘과 땅의 파자(破字)를 가진 글자이며 이 글자에 모든 공자의 사상은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인간이 살고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지켜야 할 규범과 도덕 윤리가 인(仁) 바로 그것이다. 율곡이 격몽요결에서 말한 학문이란 별 건의 이상하고 현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입하면 인(仁) 역시 별 건의 이상하고 현묘한 것이 아니다. 공자시대로 되돌아 가면 군주와 제후 또는 대부들과 백성들 간에, 그리고 백성과 백성들 간에 참다운 윤리의식이 인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논어에서 내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그리고 천성의 윤리를 지키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인이다. 거기에서 출발하면 부자지간에는 당연히 효(孝)가 있을 것이고 벗과의 관계에는 신(信)이 있어야 한다. 논어를 읽고 나서 주희의 말대로 발을 구르며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논어에서 얘기하고 있는 공자의 사상과 메시지를 명확히 이해한 사람일 것이다. 공자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을 강조하고 질승문(質勝文)하거나 문승질(文勝質)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다시 말하여 형식에 치우치거나 내용에만 치우치는 것을 배격한 것이다. 공자가 백세 이후의 문물도 가늠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으로, 원래 공자의 사상은 형식적인 고루함을 처음부터 고집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공자의 메시지를 형식적인 틀로 가두어 놓고 논어를 읽으면 의미는 반감된다. 공자 자신이 배격한 형식논리를 강조하고 엄격한 규범의 의미를 부여한 정주학 이후의 흐름은 오히려 공자의 본 모습을 가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공자 이전에도 물론 대학에 나오는 주수구방 기명유신(周雖舊邦 其命維新)을 내세운 주공단을 비롯한 이념의 주창자들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공자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우리 인간의 변하지 않는 기본적인 사회규범에 대해서는 시대적인 형식을 벗겨내면 공자의 얘기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시대적인 형식의 틀에 갖혀 있으면 공자의 상례와 제례는 형식만 남게 되고 고루한 불편함만 남는다. 그러나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제외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을 읽게 되면 그것은 진정한 효가 된다. 내가 읽어본 논어는 이러한 것이다. 이런 의미를 대입하여 나름대로 새롭게 논어를 읽어 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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