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논어 (論語) - 논어(論語)와 공자(孔子)에 대한 일반적 이해 #2

몽그림 2022. 4. 6. 01:58

공자가 어떻게 유가의 비조가 되었는가?

공자는 세계 사대 성인(聖人)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공자의 유교(儒敎)가 종교냐 유학(儒學)이냐에 대한 논쟁도 아직 진행형이다명확한 사실은 공자가 유학의 비조(鼻祖)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그리고 동양의 제례와 예의문화가 유가의 사상과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공자에 대한 견해는 시대와 부류에 따라 다르다. 숭공(崇孔) 비공(批孔), 심지어 반공(反孔)과 멸공(滅孔)까지 다양하다공자는 춘추시대 인물이니 지금부터 약 이천오백 년전의 교육가이며 정치사상가로 얘기할 수 있다현실정치에 뜻을 가진 공자를 정치가로 말하지 않은 것은 관중이나 안영처럼 국가경영을 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공자가 지극한 숭상과 공경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격열한 비판과 폄훼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공자는 젊은 시절부터 제자들에게 제례(祭禮)예악(禮樂),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 비롯한 인의(仁義)에 대한 것을 가르쳤으며, 제후국을 주유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강학(講學)을 하였다말년에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 그 동안 길러낸 많은 제자들이 이미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다. 정치일선에 나서지 못한 공자는 춘추와 시경을 편찬하고 증자를 비롯한 많은 젊은 제자들을 가르쳤다생전에 공자는 중부(仲夫) 또는 중니(仲尼) 불리어 졌다. 주유시에는 각국의 제후와 대부들에게 많은 자문을 요청 받기도 하고 군자로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 제후국에서도 공자는 수용되지 못하였고, 제후들 중 누구도 공자에게 정사를 맡기지 않았다나에게 나라를 맡겨주면 삼 년 이내에 나라를 개조하고 강하고 인의가 넘치는 나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던 공자의 정치실험은 끝내 시도되지 못하고 미완의 일로 끝났다공자의 짧은 현실정치 참여와 실험은 자신이 태어난 노나라에서 노정공에 의해 대사구(大司寇) 행섭상사(行攝相事) 임명되어 일한 삼 년이 안되는 짧은 기간 뿐이었다제환공(齊桓公) 보좌한 관중(管仲)이나 제경공(齊景公) 안영(晏嬰) 비해 공자가 정치에 족적을 남긴 것은 극히 일천하다그러나 그의 말과 제자들에게 가르친 그의 사상과 문화규범은 이후의 동양 사회를 중심으로 기나긴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공자의  추증

공자에 대한 추증(追贈) 공자가 죽은 후 노애공(魯哀公) 니부(尼父) 추모하고 공자 사당의 건립과 제사에서 부터 시작된다노애공은 공자 말년에 이미 국군(國君)으로 실권 없이 삼환가(三桓家) 눈치를 보던 명목상의 노제후였다그는 공자에게 정치적 자문을 구하고 자신의 입지탈환을 위해 노력하긴 했으나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고 급기야 노애공 역시 후일 삼환가에 의해 축출되어 국외로 망명하였다어쨌던 공자가 죽은 후 문상을 한 노애공은 나라의 위대한 스승이 죽었다고 애도하였고, 공자의 제자들은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렀다제자 중 성공한 제자였던 자공(子貢) 삼 년을 더 복상하여 육년상을 치르고 떠났다공자 사후 노나라, 위나라, 제나라의 재상을 지낸 자공의 복상은 공자를 위대한 스승으로 추존하는데 큰 역할을 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이후 공자의 제자들은 각 제후국으로 흩어졌고 노나라에 남은 증자(曾子)유자(有子) 제자들은 공자학파의 학통(學統)의 계승과 공자학당을 이끄는 후계자 경쟁을 치열하게 하였다유자(有子)를 후계자로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증자(曾子)를 비롯한 문인들의 반대로 사실상의 후계는 증자로 이어졌다유가(儒家)들로 통칭되는 이들 중 위문후(魏文侯) 스승이 된 자하(子夏)제자들은 주목할 만 하다

 

자하 위(魏)나라 자하학파(子夏學派) 영향을 받은 순자(荀子) 제나라의 직하학파(稷下學派) 유가(儒家)의 분파이다직하학파에서 배출된 법가의 학자들인 한비자와 이사는 마침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중국통일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최초의 중국통일에 참여하게 된다다른 유가학파를 이끈 자유(子游)를 비롯한 여러 분파로 나누어 지지만 오늘날 유가(儒家)에서는 증자(曾子)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그리고 뒤를 이은 맹자(孟子)를 정통계열로 보고 있다이사를 중심으로 한 법가의 학자들은 진시황을 움직여 산(算), 법(法), 역(易)서를  제외한 유가(孺家)의 책들을 불태우고 진왕조(秦王朝) 반정서적인 유학자들을 처벌하였다. 이러한 분서갱유(焚書坑儒)는 결국은 공자의 영향을 받은 법가의 학자들이 주도한 셈이다진나라의 분서갱유를 맞이하여 공자를 비롯한 유가(儒家)들은 왕조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혀 은둔하기에 바빴고 유가의 책들을 집안에 숨기게 된다고논어(古論語)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 의해 은닉된 공벽에서 출토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공자는 진제국을 멸망하고 한왕조를 열었던 한고조 유방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하고 공자의 유가사상은 한왕조의 통치이념의 기반이 된다한나라 고조 유방은 중국을 통일한 후 공자의 사당에 가서 참배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 심지어 각 주현의 관리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공자의 사당에 배례를 먼저 할 것을 조칙으로 정하였다공자가 죽었을 때 노애공이 공자를 추증한 호칭은 니부(尼父) 나라의 스승 이었다한왕조에서는 한고조 유방 이후  한무제에 이르기 까지 공자는 유가의 개조이며 큰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고,마침내 한평제에 의해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 추증되고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이후 후한(後漢)의 화제에 의해 포존후(褒尊侯) 다시 추증되기에 이르렀다한나라 시대의 공자에 대한 왕조의 평가는 이렇듯 지극하였고 태사공 사마천은 그의 태사공서에서 공자를 아예 제후의 반열로 기록하였다한나라 이후 북위의 효문제는 공자를 문성니부(文聖尼父) 추존하고, 북주의 정제는 추국공(鄒國公)으로 높였다한나라에서 부터 제후로 추증된 공자는 수 문제에 의해 선사니부(先師尼父), 당 고조에 의해 선사(先師), 당 태종에 의해 선성(先聖)선부(宣父), 당고조에 의해 태사(太師) 계속하여 추존되고 왕조의 존경을 받기에 이른다중국 최초의 여황제인 측천무후는 공자를 성인에 이르는 융도공(隆道公)이라 추존하였으며, 당 현종은  아예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존하기에 이른다당나라 시대에 왕으로 추존된 공자는 송나라 진종에 의해 다시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추존 되었으나 서하의 인종은 문선제(文宣帝)로 아예 황제로 추증하였다.  이후 원나라의 성종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역시 황제급의 존호를 올렸다이후 명나라에서는 세종 때 지성선사(至聖先師), 청나라 세조 때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 지성선사(至聖先師), 마지막에 장개석의 중화민국에서는 1935년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존호를 올렸다. 이러한 가봉(加封)추존(追尊)외에도 역대의 학자들에 의해 소왕(素王), 공성인(孔聖人), 공부자(孔夫子) 그리고 청나라 강희제에 의해 만세사표(萬世師表) 등의 존호가 더해지기도 하였다이러한 공자에 대한 추존은 공자의 아들 공리와 손자인 자사가 제후로 추봉되는 데 이르렀다공자의 후손으로 공문을 계승하는 계승자에게 추국공이나 포성후의 지위를 주었다당 현종은 공자의 35세손 공수지에게 초대 문선공의 작위를 주고 이를 세습케 하였다이후 12대 문선공인 공종원에 이르자 북송의 인종은 연성공(衍聖公)으로 개봉하였다공종원은 초대 연성공이 되었으며 연성공의 작위는 현재까지 세습되고 있다우습게도 왕조가 남북으로 갈라지면 각기 다른 연성공을 임명하여 두 명의 연성공이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이는 연성공을 가진 왕조가 정통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근세에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하면서 문화재와 함께 먼저 데리고 간 사람이 공자의 후계 작위를 가진 연성공 공덕성이다모택동도 공자와 자신을 중국의 문화승계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비공비림(非孔非林)운동을 방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왕조와 통치자는 달랐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국가의 스승에서 제후로, 왕으로, 마침내 황제로까지 추봉(追封)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추존은 공자 사후 거의 왕조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계속되어왔고 지금도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한 부분의 하나로 공자의 추대 열풍이 일어나고 있다.

 

공자에 대한 비판과 폄훼

공자가 항상 추숭된 것만은 아니다. 도가의 경전으로 읽혀지는 장자에서는 공자시대의 도적의 괴수인 도척과 견주어 공자를 도구(盜丘)로 쓰고 있으며 54 문화혁명 때 중국의 학자 오우(吳虞) 도구(盜丘)끼친 화는 만세에 미친다고 극단적인 혹평을 가하기도 하였다반제 반봉건을 주장한 이들 학자들은 공자의 학설은 군주를 위한 우민정치의 도구일 뿐이라고 혹평하였다이 문화혁명기에는 공자를 공이선생(孔二先生)으로 폄칭하여 봉건사상의 원류로 비하하였다공자를 흑제지자(黑帝之子)라고 폄하여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공자의 어머니가 니구산에서 빌어서 낳았다고 비하하는 말이다도가에서는 공자를 유동보살, 현궁선, 태극상진군이라고 불러 유가(儒家)의 동자(童子)로 낮춰 부르기도 하며, 불교에서는 불제자의 하나로 광정동자(光淨童子) 부른다. 무엇보다 역사상 가혹한 폄훼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중국 공산당의 비공비림(批孔批林) 들 수 있다분서갱유에 의해서도 상당수의 유가서가 불타 없어졌지만, 1960년 중반 공산당내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모택동에 의해 홍위병을 앞세워 전개한 비공비림 운동은 공묘를 파괴하고 상당수의 고문헌이 불타고 멸실되는 화를 입게 되었다. 공자는 유물론적인 기득권 계급의 옹호론자로 낙인 찍혀 혹독한 폄훼를 받게 된다노자에서는 아예 공자가 친구인 유하계의 동생인 도척을 교화시키려다가 목숨을 구걸하여 도망치는 일화를 기록함으로써 공자의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공자가 유하계와 친구라는 시대적 설정도 맞지 않지만 가상의 얘기이긴 해도 지나치게 공자의 위상을 폄훼한 것으로 후세의 많은 사람이 인용하게 만들었다.

 

또 하나 학자들이 얘기하는 것은 공자의 출생에 관한 것과 공자의 삼대출문에 관한 얘기이다공자 출생 얘기는 태사공서(太史公書) 나오는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가 야합에 의해 공자를 출생하였다는 기록에 근거를 둔 얘기이다물론 공자의 아버지와 어머니 안징재가 나이 차가 많이 나고, 어머니 사후에 공자가 아버지의 묘의 위치를 알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합장을 할 수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공자를 사생아 또는 공자가 아버지로 부터 인정받지 못한 자식이었다는 흥미위주의 얘기이다이러한 공자 출생의 얘기도 공자의 어머니가 무녀라는 설과 비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통칭하여 야합이라는 설로 해석되기도 한다원색적으로 들판에서 이루어진 남녀의 비정상적인 관계로 공자가 출생하였다는 말초적인 해석을 곁들이기도 한다어쨌던 이런 것들이 공자에 대한 관심과 존경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사생아든 무녀의 아들이든 그것이 공자 자체를 비판하고 바꿀만한 주요한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의 삼대출문은 공자의 소정묘 주살사건 그리고 공자의 남자와의 밀회 얘기와 함께 공자를 깍아내리는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또한 공자 자신의 가정생활이 어땠는지는 사실 정확히 알 수 없다. 공자가 주유열국하는 등 제세(濟世)의 일에 몰두하였다면 가정과 부부간의 일에 공자가 몰두하지 못했을 가능성과 그런 여지가 있었을 수도 있다이와 관련하여 공자의 삼대출문이 얘기되는데, 삼대출문(三代出門)이란 공자와 그의 아들 백어(伯魚), 손자인 자사(子思)에 이르는 삼대가 그의 처를 가문에서 쫒아낸 것을 말한다공자의 아내인 견관씨가 출문된 후 송나라에서 죽자, 공자의 아들 백어가 일년이 넘도록 곡을 하였다. 이를 들은 공자가 누가 우느냐고 짐짓 묻자 이를 들은 백어가 곡을 중지하였다고 한다 (①)이어 백어의 아내가 위나라에서 죽자 다시 자사가 곡을 하자, 문인들이 서씨의 어미가 죽었는데 어찌 공씨의 사당에서 곡을 하느냐고 물었다자사는 부끄러워 하며 내가 잘못했소 라고 하며 다른 방으로 가서 혼자 울었다고 한다 ()또 후일 자사의 아내가 죽자 자사는 그의 아들 자상(子上)에게 상을 치르지 못하게 하였다문인들이 '선생님의 아버님께서는 쫒겨나신 어머니의 곡을 하고 상을 치르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면서 자상에게 상을 치르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그러자 자사는 '옛날 아버님은 도를 알기에 높여야 할 것은 높이고 낮춰야 할 것은 낮추었네. 나는 그만한 도가 없거니와 이미 개가하였으니 내 처자가 아니고 그런즉 자상의 어미가 될 수 없다.'라고 답하였다.  (③) 이후 공자의 집안에서는 개가한 여자들의 상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예기 단궁편의 기록이긴 하지만 이를 믿을 만한 기록으로 봐야 할 것인지 아니면 도올 박사의 발처럼 부계중심의 장례문화를 강조하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①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 백어의 어머니가 죽자 기년이 되도록 곡을 하였다. 공자가 이를 듣고서 '누가 곡을 하지?'라고 물으니 문인들이 '리입니다.'라고 하였다공자는 '어허 심하구나.'라고 백어가 이를 듣고 그만 두었다.

 

魚之母, 期而猶. 夫子聞, . 與哭者? , 鯉也, 夫子, , 其甚也! 伯魚聞, 遂除.

백어지모사    기이유곡   부자문지   왈  수여곡자    문인왈  리야   부자왈   희  기심야   백어문지   수제지

 

思之母死於, 赴於子, 子思哭於, 門人, , 氏之母死, 何爲哭於孔氏之廟乎?

자사지모사어위    부어자사   자사곡어묘   문인지   왈  서씨지모사    하위곡어공씨지묘호

자사의 어미가 위나라에서 죽어 자사에게 부고로 알렸다, 자사가 사당에서 곡을 했다문인이 도착해서 말하길 서씨의 어미가 죽었는데어째서 공씨의 사당에서 곡을 합니까?’고 하자

 

思曰, , 吾過. 遂哭於他.

자사왈   오과의   오과의   수곡어타실

자사가 내가 잘못했다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며 다른 방에서 곡을 했다.

 

子上之母死, 而不喪, 門人問諸子思

자상지모사   이부상   문인문제자상   

자상의 어미가 죽었으나 상을 치르지 않자 문인들이 자사에게 물었다

 

昔者子之先君子喪出母乎?

왈  석자자지선군자상출모호

옛날에 선생님의 아버님께서는 쫒겨난 어머니의 상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 . 子之不使白也喪之, 何也?

왈  연   자지불사백야상지   하야

자사가 답하여 그런 일이 있었지.’하자 그렇다면 선생님이 흰둥이에게 상을 치르지 못하게 하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문인들이 물었다

 

子思曰, 昔者吾先君子無所失道, 道隆則從而隆, 道汚則從而汚.  伋則安能?

자사왈   석자오선군자무소실도     동융즉종이융   도오즉종이오     급증안능

자사가 하길 옛날에 우리 아버님은 도를 잃으시는 법이 없었네도에 견주어 높일 만하면 높이셨고도에 견주어 낮출 만하면 낮추셨네. 내가 어찌 그처럼 할 수 있겠는가?

 

爲伋也妻者, 是爲白也母, 不爲伋也妻者. 是不爲白也母.

위급야처자    시위백야모   부위급야처자   시부위백야모

처가 흰둥이 엄마지 내 처가 아니라면 흰둥이 엄마일 수가 없다.’고 하였다

 

故孔氏之不喪出母, 自子思始也.

고공씨지불상출모    자자상시야

그 후 공씨 가문은 이혼한 어머니의 상을 치르지 않는 것이 자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④공자의 삼대출문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오직 단궁편의 기록만을 근거로 한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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