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
오로지 천하에서 지극히 성실하면 능히 그 본성을 다할 수 있고,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능진기성 즉능진인지성
그 본성을 다할 수 있으면, 능히 다른 사람의 본성도 다할 수 있다.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능진인지성 즉능진물지성
다른 사람의 본성을 다할 수 있다면 사물의 본성을 다할 수 있고,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능진물지성 즉가이찬천지지화육 가이찬천지지화육 즉가이여천지삼의
사물의 본성을 다할 수 있다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니, 천지와 함께 셋이 될 수 있다.
(註1) 贊(도울 찬), 參(간여할 참)
(註2) 천하에서 지극하게 성실한 것을 성인의 덕의 실체라 일컬으니 천하에 더할 것이 없다 (천하지성, 위성인지덕지실, 천하막능가야 天下至誠, 謂聖人之德之實, 天下莫能加也). 그 본성을 다하는 것은 덕에서 실체가 아닌 것이 없으므로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이 없고, 천명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진기성자, 덕무부실, 고무인욕지사, 이천명지재아자, 찰지유지 盡其性者, 德無不實, 故無人欲之私, 而天命之在我者, 察之由之). 크든 작든, 정밀하든 거칠든 간에 한 터럭만큼이라도 다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한다 (거세정조, 무호발지불진야 巨細精粗, 無毫髮之不盡也). 사람과 사물의 본성 역시 나의 본성이고 받은 형태와 기질은 같지 않으므로 차이는 있다 (인물지성, 역아지성, 단이소부형기부동, 이유리이 人物之性, 亦我之性, 但以所賦形氣不同, 而有異耳). 그 본성을 능히 다하는 것은 아는 것에서 밝지 않은 것이 없고 부당한 것이 없다 (능진지자, 위지지무불명, 이처지무부당야 能盡之者, 謂知之無不明, 而處之無不當也). 찬은 돕는 것과 같다 (찬, 유조야 贊, 猶助也). 천지와 함께 셋이라는 것은 천지와 병립하여 셋이 되는 것을 일컫는다 (여천지삼, 위여천지병립이위삼야 與天地參, 謂與天地竝立而爲三也). 이것은 성실하면 밝힐 수 있는 일이다 (차자성이명자지사야 此自誠而明者之事也). 이상은 제 이십이장이고, 하늘의 도를 말한 것이다 (우제이십이장, 언천도야 右第二十二章, 言天道也).
(註3) 하늘이 준 본래의 본성은 인간이 성실하게 깨우치려 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는 천, 지, 인의 삼재를 말하고, 사사로운 욕심이 개입되지 않고, 성실히 그를 좇아 노력하면 천하에서 이를 밝게 깨우칠 수 있음을 말한다. 중용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자구의 해석과 사상의 의미를 새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얘기를 자사가 다시 설명하면서 이해하기 어렵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용이라는 전체의 큰 틀에서 이를 읽어보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성실하게 바라보면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의 본성을 다하여야 다른 사람의 본성을 볼 수 있고 사물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됨을 얘기한 것이다. 이것을 고매한 사상을 대입하고, 자구의 해석에 매달리게 되면, 중용을 강조하고 이것이 인의 실체이며 자신을 수양하는 근본임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늘의 도리와 인간의 도리가 결국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우친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자연의 순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중용의 요체임을 알게 된다. 이 글을 쓴 자사가 중용의 실체를 감추고, 그것을 달성할 수 없는 이데아적인 사상이라고 설명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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