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논어 (論語) - 제14편 헌문(憲問): 비심초창지 세숙토론지 행인자우수식지 동리자산윤색지 #6

몽그림 2022. 11. 17. 03:13

裨諶草創之叔討論之,

자왈    위명   비심초창지    세토론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명을 거행하는데 비심은 초안을 만들고 세숙이 토론하며,

 

人子羽脩飾之里子産潤色之.

     동리자산윤색지

행인 자우가 첨가하여 꾸미고 동리 자산이 윤색하였다.’라고 하셨다.

 

(1) (도울 비), (참 심), (풀 초), (비로서 창), (재비 ), (깃 우), (포 수), (꾸밀 식), (낳을 산), (윤택할 윤)

 

(2) 명(命)은 회맹에서 쓰일 정명문을 말한다 (위정명맹회지사야 政命盟會之辭). 정나라에서 장차 제후간의 일에서 맹회에 쓰일 정명문을 작성할 때 비심이 처음 초안을 지었다 (언정국장유제후지사, 작맹회정명지사, 즉사비심척초야이창제지 言鄭國將有諸侯之事, 作盟會政命之辭, 則使裨諶適草野以創製). 세숙(世叔)자대숙이며 정나라 대부 유길이다 (즉자대숙, 정대부 유길야 子大叔, 鄭大夫遊吉). 토(討)는 다스리는 것인데 (치야 治也), 비심이 이미 만든 것을 세숙이 다시 논의하여 상세하게 심의하는 것이다 (비심기조모, 세숙복치이론지, 상이심지야 諶既造謀, 世叔複治而論之, 詳而審之). 행인(行人)은 이를 관장하는 관리이며 (장사지관 使之), 자우는 공손휘로 정나라 대부이다 (자우, 공손휘, 역정대부야 子羽, 公孫揮, 亦鄭大夫). 세숙이 이미 토론하였지만 다시 령을 받아 공손휘가 가다듬었다 (세숙기토론, 복령공손휘수식지야 叔既討論, 複令公孫揮脩飾之). 동리(東裏)정나라 성인 중리의 이름인데 자산이 동리에서 살았으므로 이를 호로 하였다 (정성중리명, 자산거동리, 인이위호 城中裏名, 產居東裏, 因以為). 가다듬은 것을 다시 화려하고 아름답게 가다듬었다 (수식윤색개위증수사화미야 飾潤色皆謂增脩使華美也). 이 네 현인이 이렇게 완성한 것은 실패하는 일이 드물었다 (기경차사현이성, 고선유패사야 既更此四賢而成, 故鮮有敗事).

 

(3) 정나라는 서주의 마지막 왕인 주유왕의 숙부인 정백우가 주유왕을 호위하다가 죽자 동주로 옮겨 위에 오른 주평왕에 의해 정환공으로 봉해지면서 정나라가 춘추시대의 제후국이 된 나라이다정환공의 아들인 정무공은 주평왕을 잘 보좌하여 주평왕의 외조부인 신후의 딸과 결혼하고 정나라 영토를 확정 받아 정나라 기초를 닦았다정무공의 뒤를 이은 정장공은 제나라를 제압하고 서융을 정벌하는 등 강대국의 면모를 보여 춘추시대 초기의 패업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제환공의 등장과 진나라의 압박으로 점차 세력이 약해져서 이후에는 진나라와 초나라등 강대국의 눈치를 보는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자산 공손교는 정간공이 재상으로 임명하자 성문법을 제정하여 국내정치를 안정시키고 민완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정나라를 강대제후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였다자산 공손교는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로 중국 역사상 뛰어난 전략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공자는 공손교를 존경하였고 그가 죽었을 때 극진한 예를 표하고 슬퍼하였다자산이 죽고 자태숙인 대부 유길이 재상을 이어받았으나 자산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정나라가 혼란을 겪게 된다. 자태숙은 뒤늦게 깨닫고 공손교의 엄정함과 유연함을 모방하는 정책으로 정나라를 안정시켰다공손교는 강대국 초나라와 진나라를 상대로 많은 회동과 외교를 하였는데 물론 정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외교전략을 구사한 것이었다이 때 외교용 회동문서를 만들 때 위에서 열거한 세숙인 자태숙, 행인 자우, 비심등 세 대부를 거느리고 전략적으로  사용하여 외교에서 돌파구를 만들어 성공시켰다당시 정나라는 낮에는 진나라, 밤에는 초나라 라고 불릴 정도로 강대국의 침입을 적정하는 처지였다공자가 말한 것은 재상인 동리 자산을 중심으로 외교의 회맹문서를 전략적이고 정교하게 만들어 노나라와 같은 처지의 정나라를 안정시킨 공손교에 대한 성공적 치적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을 지적한 것이다공자는 공손교의 강력한 국내정치와 노련한 외교정책을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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