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논어 (論語) - 제10편 향당 (鄕黨): 축적여야 여여여야 #1

몽그림 2022. 9. 16. 02:06

10 편  향 당 ( 鄕 黨 )

공자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편이다.

唯記孔子在魯國鄉黨中言行, 故分之以次前篇也

유기공자재 노국향당중언행,   고분지이차전편야

 

 

孔子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공자어향당   순순여야   사불능언자

공자께서 마을에서는 공손하고 온화하여 말을 못하는 듯 하였고,

 

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

기재종묘조정    편편언   유근이

종묘와 조정에서는 분명하고 분별있게 말을 잘 하면서도 삼가하셨다.

 

  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

조  여하대부언   간간여야   여상대부언   은은여야

조회에서는 하대부와 더불어 얘기할 때에는 강직하셨고 상대부와 얘기할 때는 화락하되 중용의 바른 모습이셨고,

 

君在  踧踖如也  與與如也

군재  축적여야   여여여야

군주가 계실 때에는 공경하며 삼가하고 의연하셨다.

 

(1) (정성 순), (사당 묘), (조정 정), (삼갈 근), (강직할 간), (온화할 은),(삼갈 축),(밟을 적)

 

(2) 순순(恂恂)온화하고 공손함을 말하고 (온공지모 溫恭之貌), 편편(便便)분명하고 분별있게 말하는 것이다 (변야, 辯也)간간(侃侃)은 화평하고 즐거운 모양이고 (화락지모 和樂之貌), 은은(誾誾)은 정중한 모양이다 (중정지모 中正之貌).

 

(3) 오백호 마을을 당(黨)이라 하고 25개의 당(黨)을 향(鄕)이라 한다. 현(縣)의 하부 행정 단위로 현재의 읍 정도 규모로 보면 된다

 

 

君召使擯  色勃如也  足躩如也

군소사빈   색발여야   족곽여야

군주가 불러 사신을 접대하게 하면 바르게 정색하여 몸을 굽히시고 빠른 걸음을 하셨다.

 

揖所與立  左右手  衣前後  襜如也  

읍소여립   좌우수   의전후  첨여야

서서 읍을 하실 때에는 좌, 우로 손을 들어 절하시고, 옷깃의 앞, 뒷자락을 여미셨다.

 

趨進  翼如也  賓退  必復命曰 不顧矣

추진   익여야  빈   필복명왈   빈불고의

앞에서 안내 하여 빨리 나갈 때는 새가 날개를 편 듯하고 빈객이 물러가면 반드시 복명하여 빈객이 뒤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1) (부를  소),(물리칠 빈, 인도하다), (우쩍 일어날 발),(바삐갈), (읍 읍),(행주치마 첨),(달아날  추), (날개 )

 

(2) 빈은 주국의 임금이 나가서 손님을 접대토록 하게 하는 자이다 (빈, 주국지군소사출접빈자 , 主國之君所使出接賓者). 발은 낮빛이 변하는 모습 (발, 변색모 , 變色貌), 곽은 머뭇거리는 모습인데 (곽, 반피모 , 盤辟貌), 모두 임금의 명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개경군명고야 皆敬君命故也). 함께 서있는 사람은 빈객을 접대하는 사람이다 (소여립, 위동위빈자야 所與立, 謂同爲擯者也). 빈의 수는 관원 등급의 반으로 하는 바 (빈용명수지반 擯用命數之半), 예를 들어 상공은 구 등급이니 반에 해당하는 다섯 사람을 써서 차례로 손님과 주인 사이의 대화를 전달한다 (여상공구명, 즉용오인, 이차전명 如上公九命, 則用五人, 以次傳命). 왼쪽 사람에게 읍할 때는 손을 왼쪽으로, 오른쪽 사람에게는 오른쪽 손으로 읍한다 (읍좌인, 즉좌기수, 읍우인, 즉우기수 揖左人, 則左其手, 揖右人, 則右其手). 첨은 가지런한모습이다 (첨, 정모 , 整貌). 빠른 종종걸음으로 나아갈 때는 두 손을 편 모습이 단아하고 마치 새가 날개를 편 것처럼 하는데 임금을 공경하는 것이다 (질추이진, 장공단호, 여조서익, 서군경야 疾趨而進, 張拱端好, 如鳥舒翼, 紓君敬也).

 

(3) 고대 왕조 시대의 사신을 접대하는 방법은 예를 차리고 군주인 임금의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하였다. 사신이 되어 다른 나라로 갈 때에도 파견한 국가와 군주의 위신을 손상하는 것은 금도였다현대의 국가간 외교에 대해서도 자신의 나라의 국격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 또한 총 없는 전쟁이라고 일컫는 외교에서 국익을 최대화 하는 것은  외교를 담당한 외교관의 기본 임무일 것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풍신수길에게 통신사로 갔던 사절은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었다. 당시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서서 극심한 대립을 하고 있었기에 정사와 부사를 각 당파에서 보내게 되었다이들은 실패한 외교 사절의 대표적인 본보기이다국가를 대표해야 할 외교 사절이 결과적으로 파당을 대표한 셈이었고 국격을 망각한 행동으로 임진왜란을 불러 들였다. 일본의 접빈사가 대마도부터 안내하게 되어 있음에도 그들은 부사 김성일을 제외하고는 굴종적 태도로 일본의 접빈사 없이 대마도에서 일본의 풍신수길에게 향하였다. 또한 일본에 도착하여 수 개월간 풍신수길이 만나주지 않자 번번한 항의도 못하고 눈치를 보며 기다렸다교만한 외교 답서를 접수하고 김성일이 수리를 거부하자 정사인 황윤길은 항의도 하지 못하고 억류 당할 것을 염려하여  도망치듯 귀국하였다. 귀국 후 보고조차도 당파 싸움으로 일관하였고 굴종적 태도를 보인 통신사의 태도와 귀국 후 잘못된 보고로 임진왜란의 참화를 불러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