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제자들에 대한 사서의 기록으로는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자로(子路)와 자공(子貢)을 비롯한 77명의 제자들에 대한 나이와 인적 사항이 있다. 이외에도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기록된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에는 76명의 제자의 인물평이 수록되어 있다. 논어에 공자가 제자를 평한 사과십철(四科十哲)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하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중니의 제자들을 칠십칠현(七十七賢)이라고 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기록된 72명의 제자를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고 한다. 논어에 나타나는 제자들은 28명인데, 이들 삼십여 명의 제자들이 공자와 학문을 배우고 토론을 한 중심적인 제자들로 보인다. 공자의 제자는 삼천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중국인 특유의 과장도 있지만, 공자가 제후국을 주유열국(周遊列國)하면서 공자의 강론을 들은 사람중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을 전부 아우르면 그 숫자는 휠씬 많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에 대해 객관적이고 명확한 자료를 찾아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는 당시의 자료와 정황으로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공자의 학문을 후대에 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증자는 공문십철(孔門十哲)에 포함되지 않았고, 논어에서 공자에게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새길 수 없다고 야단을 맞는 재여는 공문십철에 포함되어 있다. 논어의 저술에 참여한 제자문파의 주관적인 수식(修飾)도 의심할 만 하지만 증자는 공자의 주유열국 이후 후진(後進)에 해당하는 제자였기 때문 일 것이다.
공자가어의 육본편(六本篇)에 공자가 자하(子夏)와 함께 자신의 제자에 관해 평가한 문답은 공자가 평가하는 애제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안회(顔回)의 사람됨은 어떻습니까?’
‘안회의 신의(信義)는 나보다 낫다.’
‘자공(子貢)의 사람됨은 어떻습니까?’
‘사賜(子貢)의 명민함은 나보다 낫다.’
‘자로(子路)는 어떻습니까?’
‘유由(子路)의 용맹함은 나보다 낫다.’
‘자장(子張)은 어떻습니까?’
‘사師(子張)의 엄숙함은 나보다 낫다.’
이에 자하는 공자에게 묻는다. ‘그러면 이 네 사람이 왜 선생님을 섬기는 것입니까?’
공자는 답하기를 ‘보려무나, 내가 네게 일러주마. 안회는 마음으로 능하지만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데는 능하지 못하고. 사(賜)는 명민하지만 남에게 굽힐 줄 모른다. 유(由)는 용맹하지만 능히 일에 두려워하지 않고, 사(師)는 엄숙하나 능히 화합하지 않는다. 만약 네 사람이 가진 장점을 한 사람이 다 갖추고 있다면 여기에 나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므로 이 네 사람이 나를 섬기는데 아무런 의구심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자의 평을 차치하고서라도 안회(顔回), 자공(子貢), 자로(子路), 자장(子張)과 자하(子夏)는 공자가 가장 아끼고 사랑한 수제자였다. 스승만큼 그 제자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공자의 네 사람에 대한 평가에서는 신뢰와 애정이 묻어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공자에게 동학들의 평을 물을 정도라면 공자와 소통하는 애제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사기’의 공자세가에서는 진채지액의 위난을 당한 공자가 초소공(楚昭公)의 도움으로 벗어나게 되는데, 이 때 초나라 소공은 공자에게 한 지방의 땅을 봉하여 다스리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초의 영윤인 자서가 초소공을 설득하여 이를 말린다. 영윤 자서는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점에서는 초소공과 같지만, 초의 한 지방을 떼어 분봉하고 이를 공자에게 다스리게 하는 것은 초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 때 초소공은 자서와 나눈 문답은 공자의 제자들의 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군주의 사신으로 보낼만한 인물 중 자공(子貢)만한 사람이 있소?’
‘없습니다.’
‘군주를 보필하는 재상 중에 안회(顔回)만한 사람이 있소?’
‘없습니다.’
‘군주의 장수 중에 자로(子路)만한 사람이 있소?’
‘없습니다.’
‘군주의 신하 중에 재여(宰予)만한 사람이 있소?’
‘없습니다.’라고 문답을 한 후 초소공은 공자의 등용을 포기한다.
많은 학자들은 단순히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하, 은, 주 삼대의 문물과 제도를 공부한 공자의 식견과 공자를 따르는 제자들의 능력을 시기한 자서가 초소공을 만류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다. 제후국간의 무한경쟁의 상황에서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제후들은 인재를 쓰는데 그리 인색하지 않았으며 비록 적국 출신이라도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널리 쓰고자 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초나라 제후인 소공은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와 백비등 초나라의 망명인사들을 앞세운 오나라에게 무참히 수도를 함락당하고 간신히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할 때였다. 소공은 외교와 군사력과 행정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공자와 그 제자집단을 채용하여 나라를 재건하고자 했을 것이다.많은 사람들은 영윤인 자서가 공자를 시기하고 그 제자들을 배제한 편협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것보다는 공자의 이론과 이상이 자신의 나라를 위한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여기서 자공이 외교에, 안회가 백성을 다스리는 능력에, 자로가 군사적인 소양에, 재여가 행정에 능력이 있는 것이 이미 제후들에게 알려져 있을 정도로 공자 일행이 명성을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과 공자가어등을 근간으로 하여 공자의 유명한 제자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안회(顔回) ┃ 顔回者, 魯人也, 字子淵. 少孔子三十歳
자(字)는 자연(子淵) 또는 안연(顔淵), 안자(顔子)로 높여 불린다. 아버지인 안로(顔路)에 이어 공자에게 배운 제자로 공자가 가장 아꼈던 애제자(愛弟子)이다. 공자보다 서른 살이나 적었지만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문묘(文廟)에는 공자 옆에 사성(四聖)으로 배향되었다. 내성적이고 몸이 약하고 빈궁하게 살았지만 공자는 그를 어질고 안빈낙도를 하는 제자로 사랑했다. 공자는 신의가 있으며 학문을 가장 좋아하는 제자로 평하였다.
┃민손閔損 ┃閔損字子騫. 少孔子十五歳
자(字)는 자건(子騫), 민자(閔子)로 높여 불린다. 효도와 덕행으로 이름을 떨쳤고 청렴결백 하였다. 노나라 대부 계씨가 지방수령을 시키려 하자 단호히 거절하는 등 권력과 이재에 초연하였고 사물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내렸다. 문묘에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고, 우리나라의 여흥 민씨(麗興 閔氏)가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염경冉耕 ┃冉耕字伯牛, 孔子以為有德行 伯牛有惡疾. 少孔子七歲
자(字)는 백우(伯牛), 공자와는 일곱 살 차이였으나 덕행으로 이름을 떨쳐 공자가 사구(司寇)로 있을 때 중도재(中都宰)로 삼았을 정도로 매우 아꼈던 초기의 제자이다. 문둥병에 걸려 세상과 등지고 은둔하였으며 공자가 운명이라며 이를 탄식하였다. 문묘에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염옹冉雍 ┃冉雍字仲弓,孔子以仲弓爲有德行
자(字)는 중궁(仲弓), 공자보다 29세 연하, 염백우의 친족으로 아버지가 망나니처럼 불초하였으나 덕행이 뛰어났다. 곤궁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고 부귀에도 교만한 기색이 없었으니 공자는 천자나 제후감이라고 칭찬하였다. 문묘에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재여宰予 ┃宰予字子我. 利口辯辭
자(字)는 자아(子我), 논어에는 공자에게 야단을 맞고 공자 말년에는 공자가 부끄럽다고 말한 제자이다.말솜씨가 뛰어나 초나라 영윤 자서는 군주의 훌륭한 보좌역으로 칭찬하고 있다. 공자가 낮잠 자는 재여를 조각할 수 없다고 훈계한 것이나 공자의 삼년상을 길다고 하면서 일년상을 주장하여 공자는 불인(不仁)하다고 하였다. 제(齊)나라 수도인 임치의 대부가 되었으나 전상과의 역모로 삼족이 처형되었고 공자는 부끄러워 하였다. 문묘에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단목사端木賜 ┃端沐賜, 衛人, 字子貢. 少孔子三十一歳. 子貢利口巧辭
자(字)는 자공(子貢), 공자보다 31세 연하, 위(衛)나라 사람이다. 탁월한 웅변가이며 외교관이며 거상(巨商)이다. 공자가 죽은 후 장례를 주관하였고 다른 제자들이 삼년상을 치르고 떠났지만 혼자서 삼 년을 더 복상하였다. 그는 이재에도 성공하여 공문(孔門)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고, 공자의 사후에도 제,오,월등 제후국에 외교전을 펼쳐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문묘에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염구冉求 ┃ 冉求字子有, 少孔子二十九歳. 為季氏宰,仲弓之族,有才藝
자(字)는 자유(子有), 염유(冉由). 공자보다 29세 연하로 재주가 많고 정치에 뛰어났다. 성격이 겸손하여 공자는 앞으로 나아갈 것을 가르쳤다, 계강자(桂康子)의 가재(家宰)가 되어 제(齊)나라의 침입을 막아 능력을 발휘하였고 공자 말년에 공자를 노나라로 귀국하게 하였다. 그러나 계강자의 잘못을 막지 못하자 공자는 화를 내고 자신의 문도가 아니라며 꾸짖었다. 문묘에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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