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論語) - 제7편 술이 (述而): 덕지불수 학지불강 #2
子曰, 德之不脩,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자왈 덕지불수 학지불강 문의불능사 불선불능개 시오우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을 수련하지 못하고, 배움이 강구되지 아니하고, 의로움을 알고도 옮겨가지 못하는 것과 선하지 않는 점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런 것이 나의 근심하는 바이다.’ 라고 하셨다.
(註1) 脩(포 수), 講(익힐 강), 徙(옮길 사), 憂(근심할 우)
(註2) 공자가 수신하는 데 걱정한 것을 말한다 (공자우재수신야 孔子憂在脩身也). 덕은 수행함에 있고 배움은 배우고 익히는데 있으며, 의로운 일은 반드시 옮겨서 따르게 하고 선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고쳐야 한다 (덕재수행, 학수강습, 문의사당사의종지, 유불선당추회개지 德在脩行, 學須講習, 聞義事當徙意從之, 有不善當追悔改之). 덕은 반드시 닦은 후에 이루어지고 학문은 배운 후에 밝아지며 선을 보면 실천하고 허물은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이 네 가지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이 요점이다 (덕필수이후성, 학필강이후명, 견선능사, 개가불린, 차사자일신지요야 德必脩而後成, 學必講而後明, 見善能徙, 改過不吝. 此四者日新之要也).
(註3) 공자와 같은 성인도 자신을 수양하고 덕을 실천하는 데 소홀함을 걱정하였다. 만약 이런 것이 형식적인 것이라면 의미는 물론 없다. 덕을 갈고 닦는 수련의 요체는 인과 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천성적인 품성이야 우리가 부모로 부터 날 때 받는 것이지만 의를 수양하고 학문을 배워 인을 알고 배움을 터득하는 것은 후천적인 노력이 없이는 이룩 될 수 없다. 자식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후천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는 천부의 품성을 깨우치는 것으로 가능하지만 효와 신, 예와 배려, 겸양등은 자신을 수련하고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자지연거 신신여야 요요여야
공자께서 집에 한가로이 계실 때는 여유가 있으시며 얼굴 빛이 온화하셨다.
(註1) 燕(제비 연), 夭(어릴 요), 燕居(연거-하는 일 없이 집에 한가히 있음), 申申(신신-여러 번 다짐하는 모양,마음이 잔잔하고 여유있는 모양,정돈된 모습), 夭夭(요요-젊고 아름다움,얼굴색이 온화함)
(註3) 정자는 이를 성인의 생활을 묘사한 것으로 보았다 (정자왈, 차제자선형용성인처야, 위신신자설부진, 고경저요요자, 금인연거지시, 불태타방사, 필태엄려, 엄려시저차사자불득, 태타방사시역저차사자불득, 유성인편자유중화지기 程子曰, 此弟子善形容聖人處也, 爲申申字說不盡, 故更著夭夭字, 今人燕居之時, 不怠惰放肆, 必太嚴厲, 嚴厲時著此四字不得, 怠惰放肆時亦著此四字不得, 惟聖人便自有中和之氣). 성인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이 쉬지 않고 휴식도 없이 일할 수는 없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을 때 취미생활을 한다든지 또는 집안 일을 한다든지 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활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까지도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두뇌가 움직일 때 우리의 세포가 쓰는 에너지는 거의 단순한 육체적인 젓보다 무려 수십 배에 달한다고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떤 복잡한 생각을 떨치고 자신을 무아의 시간 속으로 여행하게 하는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만큼 자신을 다스림에 소홀한 사람이다. 그리고 혼자 소요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여 음란하거나 난잡한 사행에 몰두하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영혼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이다.